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 (문단 편집) == 진행 == 시즌 내내 교섭 시도가 진행되지만,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과 사무국을 철저히 불신하였다. 이 당시 [[버드 셀릭]]은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 자리도 겸임하고 있어서 구단주들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할 것이라는 선수노조의 의심이 강했기 때문.[* 나중에야 버드 셀릭 본인이 짬이 차면서 상당한 권위를 갖출 수 있었지만, 이 때 버드 셀릭은 커미셔너를 맡은 지 꼴랑 2년 밖에 안 된 초짜였다. 셀릭이 커미셔너직을 맡은 것도 1992년 구단주들이 공모하여 전임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를 몰아낸 뒤 세운 바지사장 격으로 앉혀놓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1994년 6월 14일 구단주 측은 [[샐러리캡]]의 도입과 [[연봉조정]] 제도 철폐 / FA 기한 축소를 골자로 한 제안을 내놓지만, 이 제안은 선수노조에 의하여 곧바로 거부당한다. 이어서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이 9월까지 샐러리캡 안건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플레이오프]]를 보이콧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점차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구단주와 선수 사이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파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당시 미국 상원에서 상정되었던 반(反)[[트러스트]] 법안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샐러리캡 도입과정에서 구단주들이 보여준 합의는 [[카르텔]] 행위로 규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샐러리캡 도입 자체가 무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 28일 상원에서 해당 법안은 부결되었고, 점차 모두가 설마했던 파업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7월 28일 노조는 8월 12일에 파업을 실시할 것을 결의했고, 마침내 8월 12일이 되자 파업이 현실로 옮겨졌다. 파업 이후에도 양측은 계속하여 협상을 지속하였지만 견해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이 때 선수노조는 샐러리캡 도입 대신 연봉 총액이 높은 상위 16개 구단이 자신들의 입장 수익 일부분을 나머지 12개 구단에게 분배하는 방안을 제안하지만 구단주 측에 의하여 거부된다.] 결국 9월 14일 커미셔너 버드 셀릭은 '''[[월드 시리즈]]를 포함한 잔여 경기의 취소를 발표한다.''' 억만장자 구단주와 백만장자 선수단 사이에서 벌어진 추악한 이권 싸움으로 인해 빚어진 초유의 상황에서 팬들의 분노는 폭발했지만, 여전히 선수노조와 구단주 측의 입장 대립은 첨예했다. 1994년 12월 구단주 측이 압도적인 찬성 속에 샐러리캡의 도입을 재가결하자, 선수노조 역시 당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재된 선수들 전원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맞받아친다(...)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 정치권에서도 나서기 시작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구단주와 선수노조 대표들을 한데 모아놓고 "1995년 2월 6일까지 협상을 마치고 1995 시즌은 정상적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1995년 2월 1일, 구단주들은 마침내 샐러리캡 안건을 포기하면서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나 했지만, 선수노조 측이 샐러리캡 뿐만 아니라 연봉조정 제도 철폐를 비롯한 모든 안건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면서 상황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구단주 측은 이에 대체 선수를 동원하여 리그를 개막하겠다고 맞받아쳤고, 같은 해 3월에는 연방대법원에서 대체 선수를 동원한 리그 개막이 적법하다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결국 4월 2일 장장 232일에 걸친 파업은 종료된다. 물론 파업을 종료했다고 바로 리그를 개막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1995 시즌은 본래 162 경기에서 18경기가 단축된 144경기 체제로 치러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